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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펠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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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로 펠리체는 1821년부터 1831년까지 사르데냐의 왕으로 재위했다. 그는 사보이아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아들이었으며, 프랑스 혁명과 프랑스 혁명 전쟁 시기에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다. 1821년 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가 퇴위하면서 왕위를 계승했으며, 반동 정책을 펼쳐 혁신을 억제하고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사법 제도를 개혁하고 도로망을 개선하는 등 내정을 다스렸으며, 예술과 문화를 후원했다. 카를로 펠리체는 자녀 없이 사망하여 사보이-카리냐노 가문의 카를로 알베르토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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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펠리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프란체스코 마라보티의 사후 초상화, 1851년경
프란체스코 마라보티의 사후 초상화, 1851년경
전체 이름카를로 펠리체 주세페 마리아 디 사보이아
통치
작위사르데냐 국왕
사보이 공작
통치 시작1821년 3월 12일
통치 종료1831년 4월 27일
대관식1821년 4월 25일
이전 통치자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
다음 통치자카를로 알베르토
작위제노바 공작
통치 시작1815년 6월 18일
통치 종료1831년 4월 27일
다음 통치자페르디난도 1세
개인 정보
출생일1765년 4월 6일
출생지토리노 왕궁, 토리노, 사르데냐 왕국
사망일1831년 4월 27일
사망지키아블레세궁, 토리노, 사르데냐 왕국
매장일1831년 4월 28일
매장지생피에르드퀴르티유, 오트콩브 수도원
배우자마리아 크리스티나 디 나폴리 에 시칠리아 (1807년 결혼)
왕가사보이 왕가
아버지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
어머니마리아 안토니아 페르디난다 디 스파냐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서명

2. 생애

카를로 펠리체는 사보이아 가문 출신으로, 사르데냐 왕국의 국왕이었다. 그는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와 스페인의 마리아 안토니아 페르디난다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형들인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에 이어 왕위를 계승했다. 젊은 시절부터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성향을 보였으며, 프랑스 혁명 시기에는 왕정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가 국왕으로 재위할 당시, 카를로 펠리체는 사르데냐 섬의 부왕으로 임명되어 섬을 통치했다. 그의 통치는 매우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이었으며, 반대 세력을 가혹하게 탄압하여 '카를로 페로체'(사나운 카를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행정 및 경제 개혁을 시도하기도 했다.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07년 양시칠리아 왕국의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결혼했으나 자녀를 얻지 못했다. 이는 훗날 사보이-카리냐노 가문의 카를로 알베르토가 왕위를 계승하는 배경이 되었다.

1821년, 사르데냐 왕국에서 카르보나리당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나자 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는 퇴위했고, 카를로 펠리체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즉시 혁명을 강경하게 진압하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절대 왕정을 복원하려 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자유주의 사상은 철저히 억압되었으며, 혁명 가담자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반동 정치는 그의 통치기 전반을 특징짓는다.

카를로 펠리체는 1831년 후사 없이 사망했고, 살리카 법에 따라 방계 혈족인 카를로 알베르토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2. 1. 초기 생애

어린 시절의 카를로 펠리체의 초상화, 주세페 두프라 그림, 1765-67년경


카를로 펠리체는 1765년 토리노의 왕궁에서 사보이아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와 스페인의 마리아 안토니아 페르디난다 사이에서 태어난 11번째 자녀이자 다섯 번째 아들이었다. 태어난 이후 그는 제네베제 공작의 칭호로 불렸다. 그의 부계 조부모는 사보이아의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와 그의 독일 출신 아내 헤센로텐부르크의 폴릭세나였고, 모계 조부모는 프랑스 출생의 스페인 펠리페 5세와 그의 이탈리아 출신 아내 엘리자베타 파르네세였다. 형으로는 훗날 사르데냐-피에몬테 국왕이 되는 사보이아의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와 사보이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가 있었다.

어린 시절 카를로 펠리체는 바로 위의 누나인 사보이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공주와 남동생 주세페 베네데토 플라치도(모리아나 백작)와 함께 몬칼리에리 성에서 지냈다.

젊은 시절부터 카를로 펠리체는 매우 복잡한 성격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한편으로는 일관되고 융통성이 없으며, 사적이고, 불신하며, 충동적이고, 심지어 까다롭고 복수심에 불타는 면이 있었던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정직하고 진실하며, 감성과 애정을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영리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으며, 때로는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그는 군주제와 통치권에 대한 신성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1]

프랑스 혁명과 프랑스 혁명 전쟁의 이탈리아 전역 동안, 카를로 펠리체는 형인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의 측근에 반대하는 소위 "평행 궁정"의 일원이 되었다. 여기에는 그의 형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후자의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 몬페라토의 마우리치오 주세페 공작, 모리아나 백작 주세페 플라치도가 포함되었다.[2] 이 시기에 카를로 펠리체는 개인적인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는 당시 사보이아 궁정 내의 사건과 갈등에 대한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1796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공화국군이 피에몬테를 점령하면서 사보이아 왕가는 토리노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1807년 3월 7일, 카를로 펠리체는 양시칠리아 왕국의 페르디난도 1세 (당시 시칠리아 왕 페르디난도 3세)의 딸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결혼했다.

2. 2. 사르데냐 부왕 (1799–1814)

성 마우리치오와 라자로 기사단의 성 마우리치오와 라자로 기사단 대사로서의 카를로 펠리체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는 자녀 없이 1802년 6월 4일 부인이 사망하자 동생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에게 양위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는 사르데냐 영지를 직접 통치하는 대신 카를로 펠리체에게 부왕으로 위임했다.

카를로 펠리체의 사르데냐 통치는 다소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이었다. 1794년의 사르데냐 혁명 운동(Moti rivoluzionari sardiit) 이후 섬은 광범위한 빈곤으로 혼란을 겪었고, 이는 범죄 증가로 이어졌다. 부왕은 이를 매우 가혹하게 억압하여 형인 국왕에게 "인류의 선을 위해 학살, 학살"이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카를로 펠리체는 군사 정권을 수립했고, 이로 인해 사르데냐 국민들은 그를 "카를로 페로체"(사나운 카를로)라고 불렀다. 그는 정치적 소송 조사를 위한 부왕 대표단의 특별 법정을 설치하여 반대 세력을 탄압했다. 대표적인 예로, 혁명 운동을 진압하는 데 부왕보다 더 성공적이었던 '카포폴로'(민중 지도자) 빈첸초 술리스를 다른 죄목 없이 20년 징역형에 처했는데, 부왕 자신은 이를 관대한 형벌로 여겼다. 또한 "국가 범죄자"를 박해한다는 명분으로 군사적 절차를 정당화하고, 첩보 활동, 편지 검열, 용의자 현상금 부과 등 경찰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는 행정 개혁에도 힘써 사법부와 지방 관료제의 자율성을 통제하고 봉건 제도의 일부 폐단을 바로잡으려 노력했다.[4]

실제로 왕국의 의회인 스테멘티가 40만 리라의 세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했을 때, 카를로 펠리체는 가장 가난한 계층을 세금에서 면제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또한 봉건 영주가 아닌 가신에게 유리하게 봉건 관할권 분쟁을 판결하기도 했다.[4] 부왕의 규정을 따르지 않은 아시나라 공작에 대항하여 반봉건 반란이 일어나자, 카를로 펠리체는 재산을 박탈당한 공작과 반란 주동자 모두를 처벌했다.[5]

불안정한 정치·사회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카를로 펠리체는 섬의 농업과 경제를 일부 개선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농업 사회와 왕실 광산 및 삼림 관리를 위한 사무실이 설립되었다. 또한 올리브 재배가 장려되었고, 지역 생산을 늘리기 위한 상업 계약이 체결되었다. 마지막으로 도로망 정비 사업도 시작했다.[6]

2. 3. 결혼

나폴리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사르데냐의 왕비이자 카를로 펠릭스의 아내


카를로 펠리체는 왕위 계승 문제로 인해 결혼해야 했다. 그의 형들인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 모두에게 남자 후계자가 없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의 아들은 사르데냐에서 병사했다), 다른 형제들도 사망했기 때문에 카를로 펠리체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사보이 왕가의 대를 이을 남성 상속자를 낳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왕가의 필요에 따라, 카를로 펠리체는 본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07년 3월 7일 팔레르모의 노르만 궁전 내 팔라티나 예배당에서 대리 결혼 형식으로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1779년 1월 17일 - 1849년 3월 11일)와 결혼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양시칠리아 왕국의 페르디난도 1세(당시 시칠리아 왕 페르디난도 3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원만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자녀를 낳지 못했다. 이로 인해 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는 카리냐노 공인 카를로 알베르토를 사보이 가문의 방계 후계자로 고려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몰락 후 1814년 5월 20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가 토리노로 귀환하자, 카를로 펠리체는 잠시 형과 합류했다가 이듬해 아내와 함께 사르데냐로 돌아갔다. 그는 잠시 토리노 궁정에 머물기도 했지만, 1821년까지 공식적으로 사르데냐 부왕의 역할을 유지했다.

2. 4. 1821년 혁명과 즉위

1820년 스페인 카디스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국왕 페르난도 7세가 1812년 스페인 헌법을 복원하자,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군주로부터 비슷한 양보를 얻어낼 수 있다는 희망이 퍼졌다. 나폴리팔레르모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사르데냐 왕국에서의 위기 징후는 1821년 1월 11일 토리노의 한 극장에서 나타났다. 경찰이 카르보나리의 상징인 검은 리본이 달린 붉은 모자를 쓴 학생 네 명을 제지하면서 충돌이 발생했다. 학생들은 저항하다 체포되었고, 이는 큰 싸움으로 번졌다. 다음 날, 학생들과 교사들은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항의했고, 요구가 거부되자 대학을 점거했다. 정부는 군대를 투입해 진압했으며, 사망자는 없었으나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며 상황은 악화되었다.

이 시위는 "페데라티(Federati)"라는 비밀 결사와의 연관성이 제기되었다. 지도자인 산토레 디 로시, 자친토 콜레뇨, 카를로 에마누엘레 아시나리, 구리에르모 모파 디 리시오 그리발디, 그리고 로베르토 다제글리오 등은 3월 6일, 당시 왕위 계승 서열에 있던 카를로 알베르토 왕자를 만났다. 그들은 카를로 알베르토가 사보이 왕가의 새로운 인물로서 절대주의 과거와 결별할 의향이 있을 것으로 보고 접근했다.[7] 이들의 목표는 왕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및 사회 개혁을 단행하고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쟁을 시작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의 깊은 반(反)오스트리아 정서를 고려할 때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었다.

음모자들은 카를로 펠리체가 모데나에 부재한 틈을 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가 계획에 반대하지 못하도록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군대를 동원해 몬칼리에리 성의 왕궁을 포위하고 국왕에게 헌법 제정과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강요할 계획이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음모자들과 국왕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맡기로 했다.[8]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카를로 알베르토는 마음을 바꿔 음모를 포기하려 했으나, 그들을 고발하지는 않았다. 음모자들은 의심을 품고 3월 10일로 예정했던 봉기를 취소하려 했다. 같은 날, 카를로 알베르토는 몬칼리에리로 가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그날 밤, 알레산드리아 수비대가 구글리엘모 안살디의 지휘 아래 반란을 일으켜 도시를 점령했다. 카를로 알베르토에게 버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혁명가들은 봉기를 강행하기로 결정했다.[9]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 1821년 반란 이후 카를로 펠리체에게 양위함


1821년 3월 11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는 카를로 알베르토가 참석한 국무회의를 소집했으나, 국왕의 우유부단함으로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3월 12일, 토리노 요새가 반란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는 카를로 알베르토와 체사레 발보에게 카르보나리와 협상하라고 지시했지만, 반란군은 듣지 않았다. 결국 그날 저녁, 군사 봉기가 확산되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는 동생인 카를로 펠리체에게 왕위를 양위했다. 당시 카를로 펠리체가 모데나에 있었기 때문에, 카를로 알베르토가 섭정으로 임명되었다.[10]

국왕의 양위는 큰 혼란을 야기했다. 이는 외세가 개입할 수 있는 왕조 위기를 초래했고, 군대와 관료 체제를 분열시켜 질서 유지를 어렵게 만들었다. 섭정 카를로 알베르토는 새 정부를 구성하고(내무장관 페르디난도 델 포초, 전쟁장관 에마누엘레 페스 디 빌라마리나, 외무장관 로도비코 사울리 디글리아노) 반란군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새 국왕 카를로 펠리체의 동의 없이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었기에, 카를로 알베르토는 그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지시를 구했지만, 연락이 닿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대중의 분노를 두려워한 카를로 알베르토는 1821년 3월 13일 저녁, 1812년 스페인 헌법과 유사한 헌법을 승인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단, 이 법은 국왕의 최종 승인을 받아야만 효력을 발휘한다는 조건이 붙었다.[11] 다음 날에는 의회를 보호하기 위한 훈타(임시 위원회) 구성을 결정했고, 이틀 후에는 마리아 테레사 왕비의 요청에 따라 약간 수정된 사보이아 버전의 스페인 헌법 준수를 맹세했다.[12]

카를로 펠리체의 초상, 1820년경


모데나에서 형의 퇴위 소식을 들은 카를로 펠리체는 즉각 행동에 나섰다. 그는 자신을 "폐하"로 칭하는 것을 거부하며, 퇴위가 강압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는 카를로 알베르토에게 "만약 그의 혈관에 우리 왕가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남아 있다면, 즉시 노바라로 가서 내 명령을 기다리도록 전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스페인 헌법과 관련하여 형의 퇴위 이후 이루어진 모든 주권 행위를 무효로 선언하고, "기존 정부 형태의 어떤 변화에도 동의하지 않으며, 배신자를 돕거나 선동했거나 헌법을 선포하려 한 모든 왕의 신하들을 반역자로 간주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깊이 낙담한 카를로 알베르토는 카를로 펠리체의 명령대로 노바라로 가서 섭정직을 포기하고 모든 이에게 카를로 펠리체에게 복종할 것을 촉구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3월 29일, 그는 카를로 펠리체로부터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떠나라는 편지를 받았다.

카를로 알베르토가 실각하자, 카를로 펠리체는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 황제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반란 진압을 위한 군대 파병을 요청했다. 4월 4일에는 두 번째 포고령을 발표하여, 일반 병사들에게는 사면을 약속했지만 반란 주동 관리들에게는 엄격한 처벌을 예고하며 타협의 여지를 없앴다.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는 이 포고령이 경솔하고 "적개심, 열정, 증오심을 가지고" 작성되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판단한 반란군은 카를로 펠리체에게 충성하는 군대가 비토리오 살리에 데 라 투르의 지휘 아래 집결한 노바라로 진격했다. 이는 결국 메테르니히의 개입을 유도했다. 4월 8일, 노바라-보르고 베르첼리 전투에서 데 라 투르의 군대와 오스트리아 페르디난트 폰 부브나 장군의 군대가 반란군을 격파했다. 오스트리아군은 4월 11일까지 베르첼리알레산드리아를 점령했고, 카를로 펠리체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데 라 투르는 10일에 토리노를 점령했다.

러시아오스트리아 황제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메테르니히, 카를로 알베르토, 모데나의 프란체스코 4세, 그리고 반역자 덕분에 왕위를 얻는다는 생각에 혐오감을 느꼈던 카를로 펠리체 자신은 4월 19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의 퇴위를 재확인했다. 이로써 1821년 4월 25일, 카를로 펠리체는 정식으로 사르데냐 왕국의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에도 카를로 펠리체는 모데나에 머물며 이냐치오 타온 디 레벨을 왕국의 중장으로 임명하는 등 대리인을 통해 통치했다. 그는 라이바흐 회의와 베로나 회의에 참여하여 자신의 절대 군주로서의 권한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오스트리아가 사르데냐 왕국 내정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그는 이 회의들에서 "혁명적 정신"의 탄압은 전적으로 자신의 권한이며 의무라고 강조했다.

카를로 펠리체는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며 반동 정치를 펼쳤다. 귀도 아스투티는 그의 통치 방식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새 국왕 카를로 펠리체는 반역자들을 재판하기 위해 특별 위원회를 사용하고 육군과 관료 기구를 숙청하기 위해 정치 수사관을 설치하는 등 임의적인 탄압 방식을 동원하여 반동을 일으켰다". 국왕은 형사 권한을 가진 혼합 민사 및 군사 재판소인 왕립 대표단, 장교 및 부사관의 행동을 조사하는 군사 위원회, 그리고 왕국의 모든 직원의 행동을 조사하는 심사 위원회, 이렇게 세 가지 다른 재판소를 설치했다.

왕립 대표단은 5월 7일부터 10월 초까지 활동하며 71건의 사형, 5건의 종신형, 20건의 5~20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대표단 해산 후 상원은 추가로 24건의 사형, 5건의 종신형, 12건의 15~20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10월 말까지 군사 위원회는 627명의 장교를 해임했다.[4] 상급 법원과 7개의 심사 부서로 나뉜 심사 위원회는 특히 유죄로 판결된 공무원과 모든 종류의 학교의 교수들을 대거 해임하고 정직시켰다.[4]

내무부 장관 로제 드 숄렉스의 지시에 따라 토리노 대학교는 폐쇄되었고 많은 교수들이 엄중한 경고를 받았다. 국왕이 형제에게 보낸 편지(1822년 5월 9일)에서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은 모두 부패했다. 교수는 혐오스럽지만 그들을 대체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나쁜 사람들은 모두 가르침을 받고 좋은 사람들은 모두 무지하다"라고 썼기 때문이다.[13]

어쨌든, 비록 억압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고발이 남발하며 개인적인 원한을 정치적 이념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있었지만,[14] 특히 제노바 총독 조르조 데 제네이를 비롯한 왕실 권력은 사람들의 탈출을 막지 못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 중 단 두 명만이 처형되었다. 또한 아글리에 백작의 편지에 따르면 카를로 펠리체는 망명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에게 비밀리에 보조금을 전달하는 것을 결코 막지 않았으며, 안젤로 브로페리오는 국왕이 이 보조금 중 하나가 1821년에 처형된 두 사람 중 한 명의 가족에게 간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 액수를 두 배로 늘렸다고 보고하고 있다.

반대 세력 탄압은 1821년 9월 30일에 종료되었는데, 카를로 펠리체가 반란에 연루된 모든 개인에게 사면령을 내렸지만 지도자, 재정가, 살인 또는 강도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는 제외되었다. 며칠 후, 카를로 펠리체는 토리노에 입성했다.

카를로 펠리체는 형들인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가 있었기에 왕위 계승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그러나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는 자녀가 없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에게는 딸만 있었기에(살리카 법에 따라 여성은 왕위 계승 불가) 1821년 자유주의 혁명으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가 퇴위하자 50세가 넘은 카를로 펠리체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나폴레옹에 의해 확산된 자유주의 사상을 억누르려는 반동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으며, 질서 회복을 위해 오스트리아 군대를 불러들였다. 오스트리아 군대는 1823년까지 사르데냐 왕국에 주둔했다. 그는 또한 1823년 스페인 자유주의 반란 진압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1831년 카를로 펠리체는 아들 없이 사망했고, 살리카 법에 따라 먼 친척이자 방계인 카리냐노 공 카를로 알베르토가 왕위를 계승했다.

3. 통치 (1821–1831)

1821년 피에몬테에서 자유주의 장교들을 중심으로 한 입헌 혁명이 일어나자 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가 퇴위하면서 카를로 펠리체가 왕위를 계승했다. 당시 그는 모데나에 있었기 때문에 먼 친척인 카리냐노 공 카를로 알베르토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혁명 세력의 요구를 받아들여 헌법 제정을 약속했다.

그러나 카를로 펠리체는 이러한 조치를 승인하지 않았다. 토리노의 통제가 회복되자 그는 라이바흐 회의가 열리고 있던 오스트리아 황제와 직접 소통하며 자신이 절대 군주로서 영토를 완전히 통제할 것임을 확인받고 오스트리아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했다. 이후 베로나 회의에서도 그는 "혁명적 정신"의 탄압은 전적으로 자신의 권한임을 강조하며 헌법 개정 압력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토리노에 도착하기 전부터 카를로 펠리체는 섭정 카를로 알베르토의 약속을 거부하고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오스트리아 군대를 불러들였다. 오스트리아군은 1823년까지 피에몬테에 주둔했다. 카를로 펠리체는 모데나에 머물며 이냐치오 타온 디 레벨을 왕국의 중장으로 임명하고, G. 피코노 델라 발레와 G.C. 브리뇰레를 각각 외무 및 재무 담당으로 임명했다.

카를로 펠리체 국왕 초상, 1825년경


즉위 후 카를로 펠리체는 곧바로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그는 특별 위원회를 설치하여 반란 가담자들을 재판하고 군대와 관료 조직을 숙청하는 등 강경한 반동 정책을 펼쳤다. 이를 위해 형사 권한을 가진 혼합 민사 및 군사 재판소인 왕립 대표단, 장교 및 부사관 조사를 위한 군사 위원회, 모든 공무원 조사를 위한 심사 위원회 등 세 개의 재판 기구를 설치했다.

왕립 대표단은 1821년 5월부터 10월까지 활동하며 71건의 사형, 5건의 종신형, 20건의 5~20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이후 상원은 추가로 24건의 사형, 5건의 종신형, 12건의 15~20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군사 위원회는 10월 말까지 627명의 장교를 해임했다.[4] 심사 위원회는 유죄 판결을 받은 공무원과 교사들을 대거 해임하거나 정직시켰다.[4] 특히 내무부 장관 로제 드 숄렉스의 지시로 토리노 대학교가 폐쇄되고 많은 교수들이 경고를 받았다. 카를로 펠리체는 1822년 형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은 모두 부패했다. 교수는 혐오스럽지만 그들을 대체할 방법이 없다... 나쁜 사람들은 모두 가르침을 받고 좋은 사람들은 모두 무지하다"고 쓸 정도로 대학과 지식인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13]

이러한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국외로 망명했으며, 제노바 총독 조르조 데 제네이를 비롯한 왕실 인사들은 이들의 탈출을 막지 않았다. 실제 사형이 집행된 사람은 단 두 명에 불과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카를로 펠리체는 망명자들에게 비밀리에 보조금을 전달하는 것을 묵인했으며, 처형된 사람의 가족에게는 보조금을 두 배로 늘려주기도 했다는 주장도 있다.

반대 세력 탄압은 1821년 9월 30일, 반란 지도자, 자금 제공자, 살인 및 강도 유죄 판결자를 제외한 모든 관련자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지면서 일단락되었다. 며칠 후 카를로 펠리체는 토리노에 입성했다.

한편, 헌법 제정을 약속했던 카를로 알베르토는 카를로 펠리체의 미움을 샀으나, 1823년 스페인에서 일어난 자유주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어 국왕의 신임을 일부 회복했다. 이 행동은 이탈리아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배신으로 여겨졌지만, 카를로 펠리체가 다른 후계자를 선택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그의 입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카를로 펠리체는 프랑스 혁명으로 도입되고 나폴레옹에 의해 유럽 전역에 퍼진 자유주의적 사상과 제도를 "사악하고 신성 모독적인 혁신"으로 간주하며 이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믿었던 확고한 반동주의자였다. 그는 재정 및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도로 건설, 공공건물 건립, 산업 장려 등 일부 공공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1831년 카를로 펠리체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살리카 법에 따라 방계인 카리냐노 공 카를로 알베르토가 왕위를 계승했다.

3. 1. 내정 정책

1828년 1 리라 동전에 묘사된 카를로 펠리체


카를로 펠리체는 국왕으로서 토리노에 거의 머무르지 않았고 수도의 사교계 활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왕위를 원하지 않았으며, 나폴레옹과 헌법 제정 요구에 대한 지지를 통해 왕조를 배신했다고 여긴 토리노 사람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주로 극장 시즌에만 토리노에 머물렀고, 나머지 시간은 사보이, 니스, 제노바(그가 가장 좋아했던 거주지 중 하나) 그리고 누이 마리아 안나(Maria Anna)에게 물려받은 고보네와 아리에의 성들을 여행하며 보냈다.

이러한 이유로 국왕은 많은 권한을 장관들, 특히 내무부 장관 로제 드 콜렉스 백작에게 위임하고 자신은 감독 역할에 머물렀다. 그의 정부에 대해 마시모 다제글리오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직선적이고 정직한 의도로 가득 찬 전제 정치였지만, 그 대표자들과 중재자들은 네 명의 늙은 시종, 네 명의 늙은 시녀였으며, 수많은 수도사, 사제, 수도승, 예수회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를로 펠리체는 개혁의 필요성을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았으며, 교황과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피에몬테 왕국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는 국가에 해롭다고 판단되는 교회의 특권과 면제를 제한하고, 성지에서의 성역권을 거의 폐지했으며, 세속 법원이 사제 관련 소송을 심리할 권리를 부여하고, 교리 문답, 설교, 종교 서적에 대한 시민의 감독을 강화했다.

1792년 교황의 동의 하에 세속화된 교회 재산과 일방적으로 세속화된 프란체스코 수도회 재산 문제에 대해서는 성직자 지지자들과 관리들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를 임명했다. 1827년 12월, 필리베르토 아보가드로 디 콜로비아노 특명 대사가 교황 레오 12세에게 전달한 제안은 추기경 회의에서 검토되었으나, 일부 재정 세부 사항과 국가의 재산 자유 처분 권리가 거부되었다. 그러나 1828년 4월 1일, 국왕은 새로운 회의를 소집하여 재정 문제에 유연성을 보이면서도 처분 문제에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고, 그 결과 1828년 5월 14일 교황청에서 합의가 승인되었다.[15]

또한 중요한 입법 개혁들이 이루어졌다. 1822년 7월 16일 칙령으로 저당 제도를 개혁했고, 1822년 8월 27일 칙령으로 군 형법을 통일했으며, 1822년 9월 27일 칙령으로 사법 제도를 개혁했다. 이러한 변화들은 1827년 1월 16일에 서명된 ''사르데냐 왕국의 민사 및 형사 법률'' 제정으로 이어져 낡은 Carta de Logu를 대체하게 되었다. 법률가 E. Genta는 이 시기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카를로 펠리체는, 반동과 개혁가를 동시에 포함했던 복원 시대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매우 다양한 경험을 했으며, 나폴레옹 국가로 끝난 18세기의 전제주의의 부활과 이탈리아에서 별로 성공하지 못했던 역사적 혁신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으로는 왕조적 절대주의를 업데이트하려는 전형적인 노력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외와 수정 사항이 있었지만 프랑스 시스템을 실질적으로 채택했다."

실제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 퇴위 후 프랑스가 취한 모든 조치를 무비판적으로 철회하는 강경 반혁명을 시행했지만, 국가는 동시대 세계의 이념과 요구에 부합하는 법률을 원하는 다수 국민의 의지를 계속 무시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간극을 메우기 위한 개혁이 필요했다.[16]

1822년 9월 27일, 카를로 펠리체는 저당 공표 재개와 군 형법 성문화 이후, 사르데냐를 제외한 본토의 민사 사법 제도 개혁 칙령을 공포했다. 이 칙령은 도박 위반이나 항만 관리 등 다수의 특별 관할권을 폐지하고, 원심 관할권을 가진 40개의 집단적 현청 법원(416개의 "지방 법원" 관리)을 설립했다. 이 법원들은 지역 중요도에 따라 4등급으로 나뉘었으며, 절차 지시는 특별 구성원에게 위임되었다. 민사 및 형사 관할권은 토리노의 상원에, 재정 관할권은 감사원에 남았다.[17] 또한, 이전의 복잡한 상소 절차를 없애고 단일 상소 관할권을 도입했으며, 재정 변호사 직책을 신설했다.[18] 마지막으로, 사건의 심각성에 따라 계산되어 판사 급여를 충당하던 무거운 사법 수수료인 '스포르툴라'(sportula|스포르툴라it) 제도를 폐지하고, 국가가 정규 급여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꿔 소송 제기를 무료로 만들었다.[19]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주로 콜렉스 백작의 노력으로 1827년 1월 16일에 공포된 사르데냐 왕국의 민사 및 형사 법률 법전이었다. 이 법전은 토리노에서 사르데냐 최고 의회가 준비하고, 사르데냐 위원회와 사르데냐의 Reale Udienza가 검토했다. 그 결과 전통적인 사르데냐 자료와 본토 자료가 혼합되어 새로우면서도 전통적인 법률이 만들어졌다.[20]

형법 분야의 가장 큰 변화는 다음과 같다.

  • '주다티코'(giudatico|주다티코it): 다른 범죄자를 체포한 범죄자에 대한 면책 제도 폐지.
  • '에셈플라리타'(esemplarità|에셈플라리타it): 시체를 능지처참하고 재를 뿌리는 등 사형의 잔혹한 집행 방식 폐지.
  • 사형 집행 제한.
  • 처벌이 범죄에 비례해야 한다는 원칙 확인.
  • 미수 범죄와 실제 저지른 범죄(기수)의 구별.[21]


마지막으로, 노예 무역이 폐지되었고, 사르데냐 국기를 게양한 배에서 억류된 사람을 발견하면 즉시 석방될 것이라고 선언되었다.[22]

제노바의 카를로 펠리체 극장


카를로 펠리체 통치 시기는 재정적, 경제적 어려움과 경직된 보호주의로 특징지어졌지만, 공공 서비스 및 사업과 관련된 몇 가지 중요한 계획이 실행되었다.

도로망은 칼리아리사사리를 잇는 도로(현재 131번 국도 카를로 펠릭스)와 제노바와 니스를 잇는 도로 건설로 개선되었다. 또한 보르미다강과 티치노강 위에 다리가 건설되었는데, 후자는 1828년에 완공되었다. 도시들에는 많은 공공 건물이 세워졌다. 니스 항구가 대대적으로 복원되었고, 제노바에는 국왕의 이름을 딴 카를로 펠리체 극장이 건립되었다. 토리노는 도라 리파리아강 위의 다리 건설, 카를로 펠리체 광장 조성, 지하 배수관 설치, 피아차 카스텔로의 회랑 건설, 새로운 교외 지역 개발 등 도시 개선 계획의 혜택을 받았다.

카를로 펠리체는 부왕 시절부터 관여했던 철강 산업에 관심을 기울였고, 은행 및 보험 산업도 크게 개선되었다. 1827년 토리노 저축 은행이 설립되었고, 1829년 6월에는 왕립 상호 보험 협회가 설립되었다. 그는 또한 농업 및 제조업 부문을 장려하기 위해 많은 면세 및 재정 혜택을 부여하고, 1829년에는 500명의 전시자가 참여한 무역 박람회를 창설하기도 했다.

3. 2. 외교 정책



카를로 펠리체는 이론적으로는 왕국의 영토 확장에 관심을 두었으나, 실제로는 팽창주의적 목표보다는 왕국의 경제적, 상업적 이익 증진에 더 집중하는 외교 정책을 펼쳤다.[23][24] 이러한 기조 하에 1821년에는 오스트리아영국의 도움을 받아 오스만 제국과 유리한 조건의 무역 협정을 체결했다.

1825년 9월에는 트리폴리 베이가 1816년 영국 후원 하에 맺었던 조약을 준수하고 북아프리카 해안을 항해하는 사르데냐 선박의 안전을 보장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무력 시위를 감행했다(트리폴리 전투 (1825)). 프란체스코 시보리 선장의 지휘 아래 사르데냐 해군 함대가 트리폴리 해안에 파견되었다. 파견된 함대는 다음과 같다.

함선 종류함선 이름
프리깃함코메르치오 (Commercio)
프리깃함크리스티나 (Cristina)
코르벳함트리토네 (Tritone)
브리건틴네레이데 (Nereide)



외교적 압박이 실패하자, 9월 27일 밤 사르데냐 해군의 롱보트 10척이 트리폴리 항구에 침투하여 트리폴리 브리건틴 1척과 스쿠너 2척을 불태우고 트리폴리 군대에 피해를 입혔다. 이 공격으로 트리폴리 베이는 결국 더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25]

또한 카를로 펠리체는 스페인에서 발생한 자유주의자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군대를 파견하여 스페인 국왕의 신뢰를 얻었으나, 이러한 개입은 국내 자유주의자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

1828년에는 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가 오스트리아 황제와의 조약에 따라 몇 년 전 시작했던 보팔로라 소프라 티치노의 티치노 강 다리 건설을 완료했다. 이 다리는 강 건너편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을 통치하던 오스트리아와의 연결성을 강화하는 의미를 가졌다.

3. 3. 문화 정책

오트콤 수도원에 있는 카를로 펠리체의 묘


카를로 펠리체는 예술과 문화의 후원에 적극적이었다. 1824년, 그는 많은 조상들이 묻힌 오트콤 수도원을 인수하여 건축가 에르네스토 멜라노에게 복원을 맡겼다.

같은 해, 그는 현재 토리노 이집트 박물관의 주요 소장품이 된 이집트 유물 컬렉션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유물들은 당시 이집트 주재 프랑스 영사였던 바르바니아 출신의 베르나르디노 드로베티로부터 사들인 것으로, 토리노 과학 아카데미 궁전에 보관되었다.

1827년에는 회계 상공 회의소, 회화 및 조각 아카데미와 연계된 고문서 및 외교 학교를 설립했다.

4. 사망과 계승

카를로 펠리체는 1831년 4월 27일, 토리노의 샤블레 궁전에서 후사 없이 사망했다. 그는 10년 동안 통치했으며, 사후 오트콩브 수도원에 묻혔고, 그의 부인 역시 1849년에 그곳에 안장되었다.

카를로 펠리체의 죽음으로 사보이 왕가의 본가는 단절되었다. 살리카 법에 따라 왕위는 방계인 사보이-카리냐노 가문의 맏아들 카를 알베르토에게 계승되었다. 카를로 펠리체 본인은 형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가 자녀가 없었고, 다른 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에게는 딸만 있었기에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낮았으나, 1821년 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가 입헌 혁명으로 퇴위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카를로 펠리체는 카를 알베르토의 자유주의적 성향과 카르보나리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 때문에 그를 후계자로 탐탁지 않게 여겼다. 실제로 카를로 펠리체는 1821년 자신이 부재중일 때 섭정으로 임명된 카를 알베르토가 자유주의자들의 헌법 제정 요구를 수용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하는 등 반동적인 통치를 이어갔다. 하지만 살리카 법에 따라 다른 적법한 남성 계승자가 없었기에, 그의 사후 카를 알베르토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5. 유산

제노바에 있는 카를로 펠리체 극장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세기에 건설된 사르데냐 섬의 주요 도로인 국도 131 카를로 펠리체는 칼리아리사사리-포르토 토레스를 연결하며,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 도로의 칼리아리 쪽에 그를 기리는 동상이 있으며, 그는 도시를 가리키고 있다. 이는 칼리아리 칼초 팬들의 축하 행사에서 전형적인 소품으로, 팀이 승격되거나 강등을 면할 때마다 팀의 색상인 빨간색과 파란색 망토와 깃발로 장식된다.[26]

참조

[1] 서적 Carlo Felice
[2] 서적 Vittorio Emanuele I
[3] 서적 Unhomme d'autrefois Paris 1877
[4] 웹사이트 Carlo Felice di Savoia http://www.treccani.[...] 2015-02-22
[5] 웹사이트 Storia di Usini, la Rivolta anti-feudale https://web.archive.[...] 2015-02-22
[6] 웹사이트 Teste di storia: Carlo Felice di Savoia, il re per caso http://testedistoria[...] 2015-02-22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Età Contemporanea
[14] 서적 Dal Piemonte sabaudo all'Italia liberale Torino, Einaudi 1963
[15] 서적 Carlo Felice Torino 1931
[16] 서적 Storia della legislazione italiana dall'epoca della Rivoluzione francese, 1789, a quella delle Riforme italiane, 1847
[17] 서적 La Magistratura. Studio sull'ordinamento giudiziario nella storia, nelle leggi straniere, nella legge italiana e nei progetti di riforma
[18] 서적 La giustizia civile in Italia dal ‘700 ad oggi
[19] 서적 Storia della magistratura italiana. Le origini – la magistratura nel Regno di Sardegna
[20] 서적 Biografia di S. A. R. il duca del Genevese poscia re C. F., in Note sarde e ricordi Torino 1868
[21] 서적 La Sardegna di Carlo Felice e il problema della terra Cagliari 1967
[22] 간행물 I re di Sardegna pel riscatto degli schiavi dai Barbareschi 1935
[23] 서적 La politica estera di Carlo Alberto nei suoi primi anni di regno Firenze 1928
[24] 서적 Storia della Diplomazia
[25] 문서 Account from Am. Des Geneys Arch. di Stato di Torino
[26] URL https://www.sardinia[...] 202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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